청풍(淸風)은 충청북도 제원군(堤原郡)에 있던 옛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시대(時代)에는 사열이현(沙熱伊縣)이었다가,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청풍(淸風)으로 고쳤다.
조선조 현종(顯宗) 초년에 왕비의 관향(貫鄕)지라 하여 도호부(都護府)를 설치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서 명문(名門)으로 일컬어진 청풍 김씨(淸風金氏)는 신라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예(後裔)인 대장군(大將軍) 김순웅(金順雄)의 12세손 김대유(金大猷)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그는 고려(高麗) 말에 문하시중(門下侍中 : 고려 때 문하성의 정1품 으뜸 벼슬)을 지내고 청성(淸城 : 청풍의 별호) 부원군(府院君)에 추봉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관향(貫鄕)을 청풍(淸風)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빼어난 명현(名賢)과 충신(忠臣)을 많이 배출시켜 명문(名門)의 지위를 지켰다.
특히 청풍 김씨는 조선조(朝鮮朝)에서 상신(相臣 :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별칭) 8명, 대제학(大提學 : 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벼슬) 3명, 왕비(王妃) 2명이 나왔으며, <3대정승>과 <부자영상(父子領相)>을 배출하여 청송 심씨(靑松沈氏)·달성 서씨(達成徐氏)와 함께 명문(名門)으로 명성을 날렸다.
가문(家門)의 두드러진 인물(人物)을 살펴보면 7세손 길통(吉通)이 조선 세종(世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의영고 부사(義盈庫副使)를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지낸 후 전라(全羅)·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한성판윤(漢城判尹) 등을 거쳐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올라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월천군(月川君)에 봉해지고 숭정대부(崇政大夫 : 종1품)에 이르렀으며, 그의 맏아들 순경(順敬)은 판사(判事)를 지냈고, 넷째 순명(順命)은 세조(世祖)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평정(平定)하여 적개 이등공신(敵愾二等功臣), 성종(成宗) 때는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어 청릉군(淸陵君)에 봉해졌으며, 4조(四曹)의 참판(參判)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다.
한편 숙필(叔弼)의 아들 식(湜)은 현량과(賢良科)에 장원급제하여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대사성(大司成 : 조선 때 유학의 일을 맡아보던 정3품 관직)이 되었으며, 조광조(趙光祖)·김안국(金安國) 등과 함께 도학소장파(道學少壯派)를 이루어 제도개혁(制度改革)과 이상정치(理想政治)의 구현을 위하여 애쓰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유배되자 「군신천세의(君臣千歲義)」라는 시(詩)를 남기고 자결하여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일컬어졌다.
식(湜)의 손자(孫子) 권(權)은 선조(宣祖)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올랐으며, 현감(縣監) 급(汲)의 아들 신국(藎國)은 1593년(선조 26) 전주별시문과(全州別試文科)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거쳐 사복시정(司僕寺正)·관서 어사(關西御史) 등을 지낸 후 광해군(光海君) 때 익사공신(翼社功臣)으로 청릉군(淸陵君)에 봉해졌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때는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이정귀(李廷龜)와 함께 금(金)나라 사신(使臣)과 화약(和約)을 논정(論定)했고, 공조(工曹)·형조(刑曹)의 판서(判書)를 거쳐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왕(王)을 호종(扈從)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 끝가지 싸울 것을 극력 주장했다.
이듬해 볼모로 가는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이사(貳師:세자시강원 종1품 문관 벼슬)로 심양(瀋陽)에 다녀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1646년(인조 24)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광해군(光海君) 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한 시국(蓍國)은 인조(仁祖) 때 우승지(右承旨)·도승지(都承旨) 등을 지낸 후 동지사(冬至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올라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이르렀다.
대사성(大司成) 식(湜)의 현손(玄孫) 육(堉)은 실학(實學)에 바탕을 둔 경제학(經濟學)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고, 성리학(性理學)을 비롯하여 정치(政治)·천문·지리·병략(兵略)·복서(卜筮)·율력(律曆) 등 다방면에 정통했다. 효종(孝宗) 때 충청도에서의 <대동법(大同法)> 실시와 <상평통보(常平通寶)> 주조는 그의 탁월한 경제정책의 식견으로 이룩한 업적이라 할 수 있으며, 그후 우의정(右議政)·좌의정(左議政)을 거쳐 1651년(효종 2)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크게 명성을 떨쳤다.
육(堉)의 두 아들중 좌명(佐明)은 인조(仁祖) 때 대사헌(大司憲)·대사간·대사성·도승지(都承旨) 등을 지내고, 현종(顯宗) 초에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올라 아버지 육(堉)이 생전에 호남지방에 실시케 한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에 애로가 있음을 한탄하고 아버지의 유지(遺志)를 펴기 위해 호남 관찰사(湖南觀察使)로 임명해 줄 것을 간청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시 대사헌(大司憲)·도승지(都承旨)를 거쳐 1662년(현종 3) 공조(工曹) 및 예조(禮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한 후 같은 해 병조 판서(兵曹判書) 겸 수어사(守御使)가 되어 병기·군량을 충실히 관리하고 군사훈련을 엄격히 실시했으며, 글씨에도 뛰어났고, 후에 영의정(領議政)으로 청릉부원군(淸陵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우명(佑明)은 자기 딸을 세자(世子)의 빈(嬪)으로 맞아들인 현종(顯宗)이 즉위하자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에 봉해지고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가 되었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좌명(佐明)의 아들 석주(錫胄)는 1662년(현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이조좌랑(吏曹佐郞) 등을 지낸 후 숙종(肅宗) 때 우의정(右議政)으로 호위대장(扈衛大將)을 겸직했다.
그외 병조참의(兵曹參議) 두명(斗明), 우참찬(右參贊) 간(幹), 형조판서(刑曹判書) 석연(錫衍)이 유명했고, 관찰사 징(澄)의 아들 구(構)는 6조의 판서(判書)를 역임한 후 1703년(숙종 29) 우의정(右議政)에 이르고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아우 유(木柔)와 함께 이름을 날렸으며, 우의정 구(構)의 아들 희로(希魯)는 영조(英祖) 때 공조(工曹) 및 호조(戶曹)참판(參判)을 지내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그의 아우 재로(在魯)는 1710년(숙종 36) 문과에 급제하고 지평(持平)·수찬(修撰) 등을 거쳐 경종(景宗)이 즉위하자 호조 참의(戶曹參議)·부제학(副提學)·대사간(大司諫)을 지낸 후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나가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亂)을 평정하는 데 공(功)을 세워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올랐으며, 좌우의정(左右議政)을 거쳐 1740년(영조 16) 영의정에 이르고, 관찰사(觀察使)를 지낸 치후(致垕), 병조 판서(兵曹判書) 성응(聖應) 등과 함께 명문(名門)의 대(代)를 이었다.
재로(在魯)의 아들 치인(致仁)은 정조(正祖) 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와서 봉조하(奉朝賀)가 되고 1785년(정조 9)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국대전을 원전으로 하여 만든 새 법전)」 편찬을 총재했으며, 이듬해 다시 영의정(領議政)에 기용되어 조부(祖父) 구(構 : 우의정을 역임), 아버지인 재로(在魯 : 영의정을 역임)와 함께 <3대정승(三代政丞)>이자 <부자영상(父子領相)>이 되어 청풍 김씨를 명문의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이 되었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1759년(영조 35) 영의정에 오른 상로(尙魯)와 호조 판서(戶曹柔書) 취로(取魯), 이조 판서 종정(鍾正)·공조판서(工曺判書)·익휴(翊休), 병조 판서 시묵(時黙), 대사간(大司諫) 상묵(尙黙) 등이 뛰어났고, 종수(鍾秀)는 정조(正祖) 때 좌의정(左議政)에 올라 공조 판서(工曹判書) 기후(基厚)·희화(熙華), 좌의정(左議政) 약로(若魯), 예조판서 동헌(東獻)·학성(學性)·만식(晩植), 우참찬(右參贊) 경선(景善)·익문(益文),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세호(世鎬), 형조 판서(刑曹判書) 원식(元植) 등과 함께 조선조 후기에서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이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청풍 김씨(淸風金氏)는 남한(南韓)에 총20,189가구, 82,88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명성왕후릉]

[효의황후릉]